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스 플랑크 (문단 편집) === 후학들의 구세주? === 양자역학의 천재들이 등장하는 세대의 앞세대 격이다. 태어난 시기도 최소 20년(아인슈타인의 경우) 이상 차이 났다. 그래서 플랑크 본인은 보수적 학자로, 사실 양자라는 개념을 믿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.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[[왕따]]를 당했던 [[프리츠 하버]]의 재능을 인정해주었던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. 특허청 공무원 신분으로 논문을 작성하던 [[알베르트 아인슈타인]]을 발굴해낸 공로도 높게 평가된다. 아인슈타인이 특허청 공무원 시절에 쓴 논문 3편은 한편한편이 각각 물리학의 새로운 과목을 만들어낸다. [[상대성 이론]], [[광전효과]](양자역학), [[브라운 운동]]([[카오스 이론|카오스]]역학). 그것도 세 논문 모두 1905년 한 해 동안 발표했다. 1905년 '물리학 연보'의 편집자였던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이 쓴 논문의 진가를 알아보고 논문에 대한 세미나를 주최했다. 1908년 아인슈타인이 교수자리를 얻는 과정에서 플랑크가 도움을 준다. 아인슈타인이 [[일반 상대성 이론]]을 발표했을 때에도 플랑크는 이론이 아름답다며 적극 추켜세웠다. 플랑크의 [[실증주의]]에 대한 관점도 아인슈타인의 관점과 매우 유사했다. 플랑크는 1880년대 20대 시절 마흐 실증주의의 추종자였으나 이후 돌아섰으며, 아인슈타인도 한때는 마흐의 관점에 동의했다. 플랑크와 아인슈타인 모두 [[코펜하겐 해석]]은 과도한 실증주의의 함정에 빠져서 물리학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을 놓치고 있다고 주장했다. 우스갯소리로 "막스 플랑크는 두 가지 위대한 발견을 했다. 하나는 양자역학이고 다른 하나는 아인슈타인이다."라는 말도 돌아다닐 정도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